강릉 굴산사지당간지주에서 만난 고요한 세월
초겨울의 강릉은 바닷바람이 차갑게 스쳤지만, 구정면 들판에 자리한 굴산사지당간지주는 묘하게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거대한 석주는 마치 시간을 가르는 문처럼 서 있었습니다. 길게 세워진 돌기둥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도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표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오히려 고요한 위엄을 더했습니다. 주변에는 마을의 아침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멀리서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석주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화려한 절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이 두 기둥만으로도 옛 불교문화의 중심이었던 굴산사의 존재가 뚜렷이 느껴졌습니다.
1. 들판 사이로 이어진 조용한 접근로
강릉 시내에서 차로 약 20분 정도 달리면 구정면 굴산사 터 표지석이 나타납니다. 도로는 대부분 왕복 2차선으로 잘 정비되어 있고, 마을 어귀에서부터 당간지주로 향하는 길은 논밭 사이로 이어진 좁은 길입니다. 입구에 작은 안내판과 함께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주차 걱정은 없었습니다. 아침 시간이어서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고, 차문을 닫자마자 들려오는 건 풀벌레 소리뿐이었습니다. 도보로 3분 남짓 걸으면 낮은 언덕 위로 두 개의 석주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길 양옆에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사이로 햇빛이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도착하기까지의 그 짧은 산책이 이미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당간지주 강릉 굴산사지
오늘 포스팅은 초간단 글임. 당간지주를 알게된건 충남 부여에서 농장을 운영 할 때다 13년전쯤이다.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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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결하지만 힘 있는 공간의 구성
굴산사지당간지주는 절터 한가운데 서 있는 두 개의 화강암 기둥으로, 불교 의식을 알리던 깃발대를 세우던 곳이라고 합니다. 높이는 약 4.5미터 정도로, 가까이에서 보면 생각보다 크고 견고했습니다. 두 기둥 사이의 간격은 일정하게 유지되어 있고, 상단에는 깃대를 고정하던 홈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주변은 잔디로 정비되어 있으며,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낮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안내판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따랐다고 설명되어 있었고, 실제로 조각선이 단정하며 기둥의 비례가 안정적이었습니다. 주변에 불상이나 건물 흔적은 없었지만, 절터의 중심이었던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단순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공간 전체가 정연한 질서를 품고 있었습니다.
3. 석주에 깃든 장인정신과 시간의 결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보니 돌의 표면이 차가웠습니다. 거친 듯하지만 일정한 결을 가진 표면에서 장인의 정교한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양쪽 기둥의 형태가 거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비바람에 닳았을 텐데도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상부의 홈 부분은 마치 최근에 다듬은 듯 단단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정밀함은 단순한 석공 기술이 아니라 신앙의 정성을 담은 결과물처럼 보였습니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돌기둥의 그림자가 바닥 위로 길게 겹쳤고, 그 사이를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낮은 음처럼 윙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마치 시간 자체가 이 기둥 사이를 통과하며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4. 조용한 배려와 관리의 흔적
굴산사지당간지주는 규모는 작지만 관리 상태가 좋았습니다. 안내문이 새로 교체되어 있었고, 주변 잔디가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인근에 벤치가 하나 놓여 있어 잠시 앉아 풍경을 바라보기 좋았습니다. 매점이나 시설은 없지만, 대신 자연 그대로의 고요함이 있었습니다. 안내판 옆에는 QR코드가 있어 휴대폰으로 해설을 들을 수 있었고, 방문객이 적어 소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겨울을 앞둔 계절이지만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돌빛이 더욱 따뜻하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방문객이 지켜야 할 예절이 잘 표시되어 있어, 모두가 조용히 머무는 분위기였습니다. 관리의 손길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5. 인근에서 이어지는 강릉의 역사 동선
당간지주를 둘러본 후에는 인근의 ‘굴산사지 삼층석탑’과 ‘객산리 석조보살좌상’을 함께 방문했습니다. 두 곳 모두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았습니다. 특히 굴산사지 석탑은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시원한 개방감을 줍니다. 이후 강릉 시내로 이동해 ‘선교장’을 들렀습니다. 고택의 마루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이 여운을 길게 이어 주었습니다. 점심은 구정면 근처 ‘솔내막국수집’에서 막국수와 감자전을 주문했습니다. 면의 탄력과 고소한 메밀향이 잘 어우러졌습니다. 유적지 관람과 식사, 그리고 시내 산책까지 하루 일정으로 여유롭게 이어가기 좋은 루트였습니다. 역사와 일상의 조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강릉 특유의 매력이 느껴졌습니다.
6. 방문 시 유의할 점과 관람 팁
당간지주는 보호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기둥에 손을 대거나 접근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해질 무렵에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사진이 가장 아름답게 나옵니다. 오전에는 역광이 강하므로 오후 3시 이후가 촬영에 적합했습니다. 비가 온 다음 날에는 진입로 주변이 미끄러우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별도의 입장료는 없고, 조용히 관람만 하면 됩니다. 여름철에는 주변 풀숲에 벌레가 많아 긴 옷차림이 좋고, 겨울에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장갑을 챙기면 도움이 됩니다. 유적 주변에 매점이 없으므로 물 한 병 정도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짧은 시간 머물러도 마음이 맑아지는 장소이니, 급히 둘러보기보다 잠시 앉아 머물며 시간을 느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무리
강릉굴산사지당간지주는 거대한 사찰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두 개의 석주만으로도 신앙과 세월의 무게를 충분히 전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돌기둥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세워 올린 상징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석주의 실루엣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다시 찾는다면 눈이 내린 겨울, 흰 눈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날 돌기둥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바람과 시간, 그리고 고요함이 함께 머무는 자리. 굴산사지당간지주는 그 자체로 ‘침묵의 미학’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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